외가집은 깡촌이었다. 기억으로는 80년 후반까지도 5일장이 서는 그런 곳이었다. 어렸을 때 외가집에 한번 가려면 차로 먼지 풀풀 나는 꼬불길을 한참 꼬불꼬불 들어가곤 했다.
마을에는 가게 역할을 하는 집이 하나 있었다. 정말 가게가 아니라 그저 몇 가지 물건을 두고 파는 그야말로 가게 역할을 하는 집이었다. 막걸리와 정말 필요한 생필품 몇가지만 팔았던 것 같다.
그런 마을에 있던 외가집에선 자두 과수원을 했었다. 그 뿐인가? 많지는 않았지만 포도도 있었고 배나무도 있었고 감나무도 있었다.
엄마는 딸 넷 중 막내였다. 터울 많은 남동생이 있었는데 내가 초등학교 땐 외삼촌도 아직 학생이었다. 엄마 위의 이모들이 많았던 탓에 친척 오빠, 언니들이 많았는데 그들과 몰려다니며 자두 과수원에서 일종의 '전쟁놀이'를 했다. 말이 전쟁놀이지 두 팀으로 나눠 '팀숨박꼭질'을 했던 것 같다. :)
다시 찾아가는 외가집가는 길에 보였던 사과 과수원. 길거리에서 갓 수확한 사과를 팔고 있었다. 날씨도 무척 좋았고 사과도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우리는 5천원어치 구입해서 쓱쓱 닦아 와삭 베어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아름다운 한국의 과수원을 뒤로하고 우리는 달렸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외가집은 폐허가 되었지만 외할아버지의 터울 많던 남동생, 즉 작은 할아버지는 아직 그 곳에 살고 계셨다. 작은 할아버지는 이제 70이 넘으셨지만 아직도 농사를 짓고 계셨다.
포도밭을 가꿔 대부분은 밭뙤기로 팔아버리고 두어 두렁의 포도는 자식들에게 나눠주려 남겨뒀다하셨다.
난 포도를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울 아빠님은 그야말로 '환장'하게 좋아하시는지라 작은 할아버지는 우리 주시려고 열심히 포도 따고 계시는데 아빠님은 계속 홀랑홀랑 까먹고 계셨다.
그렇게 작은 할아버지는 우리 먹으라고 한 박스, 둘째 셋째 이모네 먹으라고 각각 1박스씩 총 3박스를 챙겨주셨다. 차 트렁크에 싣고보니 달콤한 뿌듯함을...울 아빠님은 느끼셨으리....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하지만 내 어린 시절 추억이 잔뜩 담겨있는 외가집에 가보기로 했다. 작은 할아버지 댁과 무척 가까웠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정말 폐허가 되어있었다. 내가 뭘 자꾸 빠뜨렸던 우물도, 그 옆 물장구 치고 놀던 돌 수조도, 힘껏 펌프질 했던 펌프도 모두 모두 말라죽어있었다.
사람이 사는 곳도 망가지긴 하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곳 역시 서서히 망가짐을 알 수 있었다. 왼쪽 작은 방엔 증조외할머니가 계셨던 곳이고 오른쪽 안방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사셨다. 여름방학에 놀러가면 아이들은 마루에 커다란 모기장을 치고 그 안에서 뒹굴며 놀다가 잠이 들곤했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돌아온 외삼촌이 친구와 수영하던 저수지. 외삼촌이 수영을 하고 나오면 거머리 두어마리가 등짝에 붙어 피를 빨아먹고 있었다. 나 역시 물장구 치고 나오다 발목에 시커멓게 붙어있던 거머리를 떼어내지 못해 울상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정말 끔찍하게도 무서웠고 징그러웠다. 잡아 먹힐 것만 같았다.
벌써 외가집이 있던 마을을 다녀온지 2여년이 흘렀다. 갑자기 센티해지면서 그 날이 떠올라 기억을 더듬거리며 옛 사진첩을 뒤지고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빠 사업이 망해 4살 아래의 남동생과 나를 외가집에 맡겨두고 서울로 올라가시기 전 엄마는, 마침 장이 섰던 오래 전 그 날 300원짜리 수박과 하얀 토끼 한마리를 손에 안겨주셨더랬다.
그저 놀기 바빴던 우리는 토끼에게 줄 풀을 뜯으러 다녔고 아무렇지도 않게 과수원에 들어가 자두를 실컷 따먹었으며 신나게 물장난을 치다가 잠이 들곤 했다. 지금 그 평화로웠던 밤이 스쳐지나간다.